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 제국/역사 (문단 편집) === 아우구스투스 등극 === BC 27년 옥타비아누스는 갑자기 이제 내전이 종결되고 그 혼란이 수습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다시 명목상으로는 이전의 공화제로 회귀한 것처럼 보였으므로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vgvstvs)"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BC 23년까지는 집정관의 자격으로, 그 이후에는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여전히 로마 군단의 최고지휘권을 보유하였고 로마 공화정의 개선장군에게 부여하던 호칭인 '임페라토르(Imperator)'를 카이사르가 독점하던 사례를 이어받아 그 역시 독점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군단의 총지휘권이 있으므로 로마 군단이 거두는 모든 승리의 영예가 옥타비아누스로 향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개인의 소유가 된 이집트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걷어 들이면서 로마 제일가는 부자이기도 하였고 이를 이용한 금화와 은화의 화폐 발행권도 반납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종종 자비를 털어서 공공건물과 가도를 건설하고 도로를 유지 보수하였으며 그 사실을 화폐에 새겨서 선전하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지니고 있던 또 다른 권력은 로마 속주 총독에 대한 임명권이었다. 본래 로마 속주 총독은 로마 원로원이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내전 종결 직후 로마 원로원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킬리키아, 키프로스, 이집트처럼 지리적으로 멀고 로마에게 점령당한 지 얼마되지 않은 속주에 대해서는 대규모 로마 군단이 주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군통수권을 장악한 옥타비아누스에게 10년 기한으로 통치를 위임하였다. 이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이들 속주에 대한 총독을 임명권을 가지게 되었고 속주 총독의 권한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유지하고 외국과의 선전포고와 강화를 자신의 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대신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주요 식량공급처였던 아프리카 속주를 비롯하여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시칠리아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에 대해서는 로마 원로원이 여전히 총독을 임명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마찰을 피했다. 이러한 속주 총독 임명권의 구분은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자연스럽게 기한이 갱신되면서 이후 '황제령 속주'와 '원로원령 속주'로 구분되는 것이 고착화되었고 옥타비아누스의 중요한 권력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옥타비아누스의 지니고 있는 권력은 대부분 기존 로마 공화정에 존재하던 합법적인 권한에 기초한 것이었으나 예외적으로 BC 23년 집정관직을 더이상 수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대신에 호민관 특권만 추가적으로 요구하였다. 호민관은 평민 출신만 출마할 수 있는 직책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귀족이 되었기 때문에 자격이 없었지만 본래 옥타비아누스가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졌다. 호민관 특권에 따라 신체불가침을 인정받아 옥타비아누스를 공격하는 것으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고 집정관을 비롯한 정무관과 다른 호민관이 내린 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지니게 되었으며 민회와 평민회, 로마 원로원을 소집하고 법률도 발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밖에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 경력자로서 풍기 단속과 정무관 감찰, 인구 조사와 같은 감찰관으로서의 역할도 부여받았는데 로마 역사상 단 한명이 감찰관과 호민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적이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